필리핀 법학도 레안드로 레수렉시온의 아버지는 57세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몰고 온 급성 호흡 부전으로 숨졌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수도 마닐라의 국영 병원 어린이메디컬센터와 파이스턴대학의 소아청소년 전문 외과 의사였다.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입원해 돌아가시기까지, 모든 일이 불과 열흘 안에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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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평범하고 가벼운 기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로서 뭔가 심상치가 않다는 걸 눈치채시고 자신을 가족들과 격리하셨습니다. 그렇게 방 안에서 혼자 며칠을 지내셨습니다. 끼니는 가족들이 문 앞에 둔 음식으로 해결하셨고 대화는 온라인 메신저를 쓰셨습니다. 우리 4남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마스크와 낯선 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부터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강하고 건강한 분이셨습니다. 특별한 기저질환을 앓고 있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린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폐렴 진단이 나왔습니다.
“아들아, 입원해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는 결과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일 코로나19 검사도 받으셨지만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입원 사유론 폐렴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아직도 그날 밤을 잊을 수가없습니다. 전화로 전해진 아버지 목소리는 전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미열 정도만 있었는데도 숨을 헐떡거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입원 준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유품을 정리하면서 알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긴 싸움을 준비하듯이 많은 옷을 챙기셨습니다.
입원 날, 아버지를 병실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절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만드셨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셨는데도 미소가 선명히 번졌습니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그다음 날, 아버지는 정밀 검사를 위해 병실을 옮기셨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인공호흡기와 기관 삽관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가 아버지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받으시고 있다고 처음 알게 된 때였습니다.
그 뒤론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사랑해요”라고 보낸 문자에 답장은 영영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 도시 봉쇄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코로나19는 딴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코로나19는 한순간에 일상을 덮쳤습니다. 매일 아침 마음 졸이며 핸드폰만 쳐다보게 했습니다. 병원에서 문자가 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문자가 안 오는 날은 좋은 날이었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요.
하루에도 기분이 수십 번씩 뒤바뀌었습니다. 희소식도 나쁜 소식도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하루 단위에서 시간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버지의 증상에 따라 저도 시시각각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상태가 나아져 마비 증상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잠시 놓고 있던 그날 밤 아버지의 상태가 갑자기 다시 악화했습니다. 의사는 폐 기능이 멈춰 장기 기능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 부작용 가능성이 있는 항바이러스제 두 종류를 투여하려고 하는데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날따라 전화벨이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자다가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는 아버지의 심장이 멈췄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심폐 소생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20분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2분만 더 해줄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깨어나시지 못했습니다.
가장 먼저 여자친구에게 전활 걸어 말없이 울었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형제들에게도 알렸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으니까요. 가족 중 단 한 명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더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종뿐 아니라 장례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신이 담긴 부대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열어볼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장 직원들은 시신을 영안실에서 화장실로 옮겼습니다. 직원들은 방호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직원들은 곧바로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벌어진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하실 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환하게 미소 짓던 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돼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수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간직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누면서 위로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은 외과 의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전 환자 중 한 분은 소식을 접하고 생전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려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영웅이셨습니다. 아버지에게 한 번만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큰 지원군인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항상 나침반이 돼 주신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아버지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19에 경각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독감과 증상이 비슷하다고 가볍게 보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이 순간에도 코로나19로 죽어가는 환자가 있습니다. 사망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습니다. 코로나19는 저희 아버지도 데려갔습니다.
그래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희망을 배웠습니다. 우린 같이 싸우고 맞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도 최대한 집에 머물면서 일선에서 고생하는 의료진을 돕고 있습니다. 모금 활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또 잘못하고 있는 공무원을 감시하고 잘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두렵지만 두려움을 똑바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비극이었습니다.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좋아질 겁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본 기사의 출처는 VICE ASIA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