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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재일 동포) 남성 이시카와 마나부가 다다미 매트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탄자 하우베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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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재일 동포가 북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

자이니치는 일본의 박해와 북한의 거짓 선전에 삶을 잃었다.

63세 남성 이시카와 마나부는 동네 이웃을 피한다. 동네 노인들은 남 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가끔 복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주차 단속원으로 일하러 간다. 그때가 유일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다. 밤에는 혼자 술을 마신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도 드물다. 현재 도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아다치에 거주하는 이시카와는 다다미 매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자이니치(재일 동포)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이니치는 일본에 사는 한인 거주자를 지칭하는 ‘재일’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시카와 같은 자이니치의 인구는 약 50만명이다. 대부분은 1910년~45년에 한반도를 떠나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사회인류학자 요코 데멜리우스에 따르면 오늘날 자이니치는 교육과 주거, 근로, 사회 보장, 정치, 고용에 있어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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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본 우익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에 있는 다문화시설 ‘후레아이칸’은 2020년 새해에 일본의 한인을 말살하겠다는 협박성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잔인하게 죽이겠다”고 적혀 있었다. 또 우익 성향 반한인 단체의 교토 지부장이었던 한 남성은 2019년 조선학교 운영자를 비방해 명예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 50만엔(약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자이니치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고도 가해자들이 처벌받는 결과를 받아보기가 힘들다. 법률 전문가에 따르면 일본의 현행법이 인종 차별을 막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은 2016년 ‘혐오 표현 방지법’을 시행했다. 도쿄 교도법률사무소의 기노시타 데츠로 변호사는 법이 외국인이나 소수 민족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이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의미다. 일본 법무성 인권보호국의 오무라 간스케 국장은 정부가 ‘혐오표현 방지법’에 따로 처벌 규정을 넣지 않은 이유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명예훼손을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은 있다. 인종 차별과 관련 있는 다른 조항도 있다. 하지만 표현이 모호하다. 기노시타 변호사는 “형법이나 특수 범죄법에서 처벌 규정을 찾을 수 없다”며 “그래서 가와사키는 그 문제를 다루는 조례를 통과시켰다”고 전했다.

가와사키는 일본 최대 한인 밀집 지역 중 하나다. 가와사키 당국은 한인들이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 당국 차원에서 문제를 직접 손보기로 했다. 그렇게 가와사키는 2020년 인종차별 처벌 조항을 시행하는 일본 최초의 지역이 됐다. 당국은 법 위반 의심자에게 경고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이름과 주소를 공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형사 처벌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법적인 보호가 부족한 탓에 많은 자이니치는 차별 행위를 당하더라도 숨죽이고 있다. 이시카와를 비롯한 일부 지역인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한인 핏줄을 숨긴다.

자이니치와 북한

일부 자이니치는 전쟁 직후와 비교하면 상황이 매우 나아졌다고 말한다. 일본은 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합하고 45년까지 점령했다. 그 기간에 많을 때는 한인 약 230만명이 일본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대부분은 빈민가에 살면서 탄광촌에서 일했다. 이들의 노동력은 일본의 중요한 전쟁 자원이었다. 하지만 전후 일본에서 자이니치는 일본의 패배를 상기해주는 존재이자 잠재적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결국 자이니치는 52년 일본 국적을 빼앗겼다. 일본 국적을 잃으면서 주거지나 복지, 건강보험, 연금을 모두 잃었다. 자이니치의 4분의 1만 직업이 있던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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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의 97%는 현재 한국으로 불리는 남한에서부터 넘어갔다. 하지만 많은 이가 45년 한반도가 분단된 후 48년에 세워진 북한에 애착이 더 컸다.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저서 ‘북한행 엑소더스’에서 “당시엔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지금보다 더 그럴듯한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자이니치의 뒤틀린 운명이 자세히 담겨 있다.

자이니치 8만7000여명은 북한으로 이주했다. 일본의 가혹함에 치이고 북한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시카와는 72년 북한으로 넘어갔던 이 중 한 명이었다. 일본에서는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연금이나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릴 수도 없었다. 계층 이동 사다리를 오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북한에 끌리는 건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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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남성 이시카와 마나부가 도쿄에서 가장 빈곤이 심한 지역인 아다치에 위치한 집에 서서 문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탄자 하우베르질

이시카와가 북한으로 건너간 건 여자 형제 때문이었다. 여자 형제가 친북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으로 북한의 선전을 확고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가면 무상 주택과 교육, 음식,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뱃삯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시카와는 “여자 형제 눈에는 북한행이 애국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장밋빛 선전에는 허점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북한행 여객선이 정박한 니가타항구에서 절망을 볼 거라고 경고했다. 또 생존에 도움이 될 거라며 일제 세이코 시계처럼 비싼 물건을 챙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여자 형제는 북한의 미래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한 귀로 흘렸다. 이시카와는 일본에 남고 싶었다. 사람들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형제들과 함께 북한행을 택했다. 듣던대로 실제 북한의 상황이 나쁘더라도 함께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시카와는 상상했던 것보다 북한의 생활 환경이 더 나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수돗물과 화장실도 없었다”며 “해진 옷과 극심한 빈곤을 아직 기억한다”고 말했다.

북한으로 온 이주민들은 주로 자기들끼리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이시카와는 북한 여성을 만났다. 여자 형제는 적응하지 못했다. 형제들을 고통스러운 삶으로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북한이 약속했던 ‘지상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고통스러워했다. 심지어 정신 질환을 앓았다. 당시 북한에 살고 있던 자이니치가 흔히 겪던 문제였다. 결국 여자 형제는 91년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숨졌다.

이시카와는 90년대 대기근을 겪고 마음을 돌렸다. 기근의 원인은 다양했다. 경제 정책 실패에 소련 붕괴가 겹쳤다. 식량 생산과 수입이 가파르게 줄었다. 가뭄과 홍수까지 겹쳤다.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적게는 수십만명, 많게는 300만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북한 최고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인민을 위한 시도는 아니었다. 이시카와는 “김 위원장은 식량 배급과 임금 지급을 중단했다”며 “그 사람이 신경 쓴 건 오직 핵무기 개발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수십만명이 굶어 죽었다”며 “거리에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2001년 북한을 탈출했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시카와는 “국경 가까이에 거주해 유리했지만 여전히 위험했다”며 “가족 모두 데리고 탈출할 때 생기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혼자 도망쳤다”고 말했다. 다른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중국으로 넘어가 일본에 있는 다른 가족에게 전화해 돈을 요청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겐 통화 때문에 국경에 간다고 말했다. 보통 국경을 넘으려면 뇌물이 필요한데 연줄을 통해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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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2016년 그를 따라 일본으로 왔다. 그는 “가족은 10년간 일본에 살았지만 집에 있는 것처럼 편히 지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자란 이시카와와 달리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4년 전 한국으로 떠났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가족과는 연락도 잘 안 한다.

이시카와는 현재 북한과 일본에 정의를 요구하는 자이니치 단체에서 일한다. 이 단체엔 79세 여성 가와사키 에이코도 있다. 일본인 기준에서 보면 여성은 직설적이고 퉁명스럽다. 도쿄의 한 카페에서 만나 “북한이 내게 하는 짓을 신경도 안 쓴다”며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될 뿐”이라고 말했다. 가와사키의 자녀 5명 중 4명은 아직 북한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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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여성 가와사키 에이코가 공원 벤치에 앉아 북한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 탄자 하우베르질

가와사키가 답을 원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과연 일본 정부가 북한이 자이니치를 북한으로 끌어들이려고 거짓 선전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다. 그는 일본 정부가 북한 정부의 선전을 눈감아줬다고 생각한다. 암묵적으로 대량 이주를 장려했다고 의심한다. 가와사키는 일본 정부가 북한의 처참한 상황을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총련이 자이니치에게 북한행을 부추기려고 ‘지상낙원’이란 거짓 선전을 할 때 방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가와사키는 일본이 ‘조용한 방관자’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지역 공무원들은 자이니치가 니가타항구로 이동하는 과정을 도왔다.

가와사키와 이시카와 등 자이니치 5명은 2018년 북한을 상대로 1인당 1억만엔(약 10억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도쿄 법원은 관할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

가와사키는 최초 귀환자들에게 받은 편지를 간직한다. 그들은 일본에 있는 친척에게 북한에서의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전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도이 가나에 일본 대표는 “(당시) 일본 정부가 끔찍한 환경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도이 대표는 2015년 법률 단체 일본변호사협회에 북송 사건을 조사하고 책임자를 규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제사회가 북한을 압박해 자이니치가 북일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렇게 되면 가와사키의 자녀들도 일본에 정착할 수 있을 거다. 도이 대표에 따르면 북한에 사는 자이니치 대부분이 북한을 탈출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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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여성 가와사키 에이코는 “내 요리 실력이 대부분 한국 식당보다 낫다”고 농담을 던졌다. 사진: 탄자 하우베르질

일본 외무성은 인터뷰 요청에 “송환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며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행해진 일을 두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가와사키는 17세이던 61년에 교토를 떠나 북한으로 갔다. 42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2003년이 돼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 이시카와의 인생처럼 그의 인생에는 역사 때문에 갈기갈기 찢긴 가족의 비극이 녹아 있다. 그는 “부모님은 결정에 반대해 북한으로 안 가셨다”며 “나와 달리 북한을 안 믿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난 더는 전후 일본에서 자이니치를 향한 차별 정책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떠났다”고 덧붙였다.

가와사키는 아직 그때를 기억한다. 배가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는 빈곤이 펼쳐졌다. 그는 “부둣가에 있던 사람들이 배를 돌리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그때는 때가 늦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북한에서 최대한 잘살아 보려고 애썼다. 운이 좋아 건축 교육을 받고 엔지니어로도 일했다. 또 북한 남성과 결혼해 자녀 다섯명을 낳았다.

가와사키는 북한에 있을 때 일본을 무척 그리워했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자이니치가 자본주의 사상을 퍼뜨릴까 봐 두려워 박해를 일삼았다. 많은 자이니치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가와사키는 “정치 이야기를 사적인 자리에서 꺼내도 위험했다”며 “우리 아이들도 세뇌당했다”고 전했다.

가와사키는 2003년 탈북해 이듬해 일본에 도착했다. 남편은 이미 사망했고 아이들은 위험한 탈출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북한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본인 삶의 역경을 세상에 전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자녀 중 한 명은 그를 따라 일본으로 왔다. 이들은 비정부단체(NGO) ‘모두 모이자’를 운영한다. ‘모두 모이자’는 북한 사람들의 삶을 알리려고 한다. 또 수많은 자이니치가 자발적으로 북한에 간 이유를 전하려고 한다. 가와사키도 전 세계를 돌며 북한에 아직 남은 자이니치 8만7000여명의 삶을 소개한다.

가와사키는 일본에서도 강연을 한다. 그럴 때면 항상 경찰에게 협조를 구한다. 그는 주먹을 공중으로 치켜올리며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렵진 않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