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Q

커밍아웃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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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지난해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고 성소수자 권리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바노 슐라모프/ AFP통신/ 게티이미지

성소수자들은 퀴어 축제나 ‘성소수자 인권의 달’(프라이드 먼스) 행사가 열릴 때면 반갑기도 하지만 부담스럽다. 모든 성소수자가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커밍아웃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리핀 남성 니코 아티엔자도 그랬다. 그도 커밍아웃 전부터 행사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런 부담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아티엔자는 성정체성에 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 연대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축제에 참가했다.

그는 최근 VICE와 인터뷰에서 “죄책감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커밍아웃하지 않았고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못한데 진심으로 힘을 보탤 수 있을까’라고 의문이 들었다”며 “스스로 사기꾼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사람이 퀴어 축제를 기념한다는 게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프라이드 먼스’인 6월이 되면 무지개를 세계 각국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볼 수 있다. 이때를 맞아 시위하거나 축제를 즐기는 성소수자들은 당당하고 떳떳해 보인다. 이런 태도를 갖추는 것이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프라이드 먼스’엔 많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기념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이달은 시위에서 시작했고 시위로 이어졌다. 퀴어 역사를 배우고 기념할 수 있는 기회다.

또 자신뿐 아니라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가까워질 수 있는 ‘초대장’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공개적이든, 사적이든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건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뿐 아니라 정체성을 숨기는 ‘은둔’ 성소수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미국인 루는 “생물학적 성별과 성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와 이성애자가 퀴어 축제에 참가하면 성소수자도 커밍아웃에 상관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다”며 “기업이 제품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을 입혀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는 생애 첫 퀴어 축제에 우연히 참가했다. 어느 날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기차에 탔을 때였다. 여기저기 걸린 무지개 깃발과 몸에 반짝이를 바른 사람을 보고 놀랐다. 경황이 없던 차에 낯선 이가 그에게 다가왔다. 루는 당시에도 이미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소개하는 게 편했다. 하지만 한 번도 퀴어 축제를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퀴어 축제에 참가해 하루를 몽땅 보냈다. 

루는 “호텔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며 “혼자 있을 때 감정이 터져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퀴어 축제처럼 사랑과 인정으로 넘치는 곳에 있다 보면 감정이 벅차오른다”며 “특히 그때 나처럼 이런 게 익숙지 않다면 더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모두가 이런 기회를 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역과 상황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는 커밍아웃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위험할 수 있다.

루는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립할 수 있거나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를 찾을 때까지는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성소수자가 실제로 커밍아웃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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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엘 크리스 아헤로. 사진: 본인 제공

지금 당당하게 퀴어 축제를 즐기는 사람도 한때는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다. 그때 마음을 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프라이드 먼스’는 자신의 커밍아웃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지만 아직 숨은 사람이 용기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미도 있다. 과거 자신의 투쟁을 기억하고 같은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위해 계속 싸워주는 거다.

필리핀 회계사 산리엘 크리스 아헤로는 “1990년대에 자라다 보니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렇게 보이면 수치심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끊임없이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며 “자부심을 갖는 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아헤로는 퀴어 축제의 역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정체성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퀴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퀴어 축제에서 두려움을 이겨낸 선배를 보면서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앞선 이를 기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선 아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서요. 이들이 남몰래 퀴어 축제를 지켜보다가 자신을 포용하는 첫걸음을 내딛을지 모릅니다.”

커밍아웃한 이들도 가끔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한다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필리핀 영화감독 알폰소 알레그라도는 “퀴어 축제에 아직 가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형 행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다”며 “하지만 성소수자 사이에 있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퍼져 가족에게 알려질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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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알레그라도. 사진: 본인 제공

알레그라도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내면에 강한 동성애와 양성애 혐오가 뿌리 박혀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물론 ‘프라이드 먼스’도 축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극복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배우고 있다. 더 많은 가족과 친구에게 커밍아웃했다. 또 다른 성소수자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안전한 커뮤니티를 찾았다.

중요한 건 ‘프라이드 먼스’라고 커밍아웃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거다.

필리핀의 오디오 엔지니어 해나 하블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 커밍아웃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사실 하블라는 커밍아웃 전엔 이미 해낸 사람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기로 했다.

필리핀 사업가 오즈 크루즈는 “마음속으로도 충분히 기념할 수 있다”고 전했다.

“매일 아침에 자신을 위해 하루를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이미 저흰 내면의 투쟁만으로도 힘들거든요. 이기는 비결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개인이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는 방법도 많다. 꼭 공개적으로 기념해야 하는 건 아니다. 반드시 축제처럼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그리 하는 것보다 의미가 덜 하지도 않다.

필리핀 은행원 키트 팡가는 “커밍아웃 안 했어도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필리핀 말라테에서 퀴어 축제에 처음 참가한 후 여러 축제에 참가했다. 에이즈로 삶을 마감했던 친구들을 위해 퀴어 축제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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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트 팡가. 사진: 본인 제공

성정체성을 숨기는 성소수자들이 나름대로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성소수자 친구나 직장 동료의 삶을 배우고 포용적인 언어를 쓰도록 노력하고 누군가가 실수하면 고쳐줄 수 있다. 성소수자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헤로는 학습도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프라이드 먼스’가 존재하는 이유, 주요 인물, 투쟁, 세상이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 같은 역사를 배워야 한다”며 “책, 영화, 다큐멘터리가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신을 더 받아들이고 커밍아웃하기로 했을 때 더 의미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알레그라도는 성소수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을 접하는 게 좋다고 제안했다. 

알레그라도는 “성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면 안전한 방법은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성소수자의 사연을 찾아보는 것”이라며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이거나 커밍아웃이 불편한 사람이면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스크린에서 보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프라이드 먼스’는 퀴어 커뮤니티에 뿌리를 둔다. 성소수자들이 수세대에 거쳐 투쟁과 기쁨을 함께하며 이은 풍부한 역사가 녹아 있다. 현재는 많은 이들이 이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존재를 수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의 권리는 시민운동가 패니 루 해머의 말을 비튼 것처럼 모두가 가지지 못하면 그 누구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는 건 사회적인 일이면서도 매우 개인적인 일이다.

성소수자는 각자의 삶에서 투쟁하고 나름대로 역경을 극복하고 기쁨을 찾는다. 이것만으로도 개인의 승리를 기념할 가치가 있다. 커밍아웃 여부에 상관없이 말이다.

커밍아웃 전에 프라이드 축제에 참가해 자신이 사기꾼처럼 느껴졌다는 아티엔자는 “감사하게도 누군가 내게 ‘괜찮다’고 말해줬다”며 “커밍아웃은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거나 성소수자에게 지지를 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했다.

“제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줬어요.”

Romano Santos